롤플레잉 게임에는 여러 직업들이 있습니다.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적 등 여러 기본 직업들이 있고, 기본 직업들의 기능이 조합되거나 변형되어 여러 가지 직업들이 탄생했습니다. 게임마다 각 직업들을 지칭하는 이름들도 제각각 다르지만, 다른 게임임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직업들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든든한 방패 역할을 자주 담당하는 팔라딘, 즉 성기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이번에는 성기사(팔라딘)의 기원은 물론, 게임에서 갖고 있는 특징들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찾아보고, 게임에서 등장하는 여러 성기사들의 모습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팔라딘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나?

팔라딘(Paladin)은 흔히 성기사(聖騎士), 또는 궁정기사(宮庭騎士)라고 번역되는데, 영어 사전을 살펴보면 “샤를마뉴의 12용사의 한 사람”, 또는 “무협가”, “의협가”, “무사도를 닦는 사람”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샤를마뉴(Charlemagn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카롤루스(Karolus) 대제(724년~814년)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2대 왕이자, 이후 서로마제국 황제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역사 시간이 아니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는 재임기간 47년간 거의 정복 전쟁을 할 정도로 전쟁으로 프랑크 왕국을 강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12명의 용맹한 기사들이 있었다… 는 것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팔라딘이란 단어 자체는 로마에 있는 7개의 언덕 중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곳은 라틴어로는 팔라티누스(Palatinus), 이탈리아어로는 팔라티노 언덕이라 합니다. 이 언덕은 과거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와 함께 발견된 곳이라고 하며, 이후에도 주로 황제나 귀족들의 궁전이 위치해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귀한 사람들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궁전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팰리스(Palac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팔라티노 언덕의 모습
샤를마뉴는 프랑스어식이고, 카롤루스는 당시에 불렸던 이름에 더 가깝다고 하는군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임기간 306년~337년)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친위대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 대신 엘리트 경호부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Scholae Palatinae)를 창설하는데, 고귀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며, 팔라딘의 어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유럽 등지에는 황제나 왕의 친위 기사단에게 팔라딘이란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12용사가 유명한 것이기에 영어 사전에도 대표적으로 나와있는 것이지요.  

 

‘토탈워: 아틸라’에 등장하는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로 로마제국 후기를 그린 아틸라에서 추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카롤루스 대제의 12용사 이야기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후세의 창작이 가미된 것이기에, 당시에 12용사를 진짜 팔라딘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팔라딘과 관련된 대표적인 창작물이 바로 ‘롤랑의 노래(The Song of Roland)’입니다. 롤랑의 노래는 11세기 작품으로, 12용사 중 한 명인 롤랑(Roland)과 팔라딘들이 아군의 배신과 이슬람 군의 흉계에 빠졌지만, 용맹하게 끝까지 싸우다 죽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롤랑의 노래의 소재가 된 론스보 전투(Battle of Roncevaux Pass)는 778년에 일어난 전투이며, 창작물에선 이슬람 군이 적이지만 실제로는 바스크족(현재의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에 있는 지방)의 습격을 받았던 것 등,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아마도 이슬람 군을 적으로 하는 것이 보다 극적이어서 바뀐 것이겠지요.

어쨌든 롤랑으로 대표되는 용맹한 기사의 이미지는 1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본 지 ‘팔라딘’을 소재로 하는 수많은 창작물이 당시에도 창작되었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에는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롤랑의 이탈리아 식 이름)라는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 등에서 따온 이야기를 기사도와 접목시켜, 현재의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롤랑의 노래의 배경이 된 론스보 전투를 그린 그림.

 

게임 속 팔라딘의 대표, 블리자드표 성기사

옛날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흔히 게임에서 나오는 팔라딘, 즉 성기사의 이미지를 살펴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기사는 아무래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성기사겠죠. 이 게임 속의 성기사의 특징은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전사와 같은 중장비 가능

2. 무적기와 치유 마법으로 바퀴벌레와도 같은 생명력

3. 광역 오라(아우라)와 버프로 파티원들에게 좋은 효과 제공

“팀의 체력을 책임진다! 인간 성기사 뿌뿌뿡!” 이게 뭔지 알면 와라버지급 아님?

이런 특징들을 지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성기사가 탄생하기까지는 기존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성기사가 걸어온 길을 봐야 할 것입니다.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성기사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게임은 ‘워크래프트 2: 어둠의 물결’부터였습니다. 풋맨 상위의 근접 유닛인 나이트를 업그레이드하면 팔라딘이 되었는데, 나이트 때는 없던 3가지의 마법을 쓸 수 있었습니다. 기본 마법으로는 시야를 밝혀주는 홀리 비전이 있으며, 업그레이드를 통해 체력을 치유해주는 힐, 그리고 언데드 유닛에게 대미지를 주는 엑소시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팔라딘 등급에 해당하는 오크의 유닛이 ‘워크래프트 2’를 통틀어 최강의 사기 유닛인 오우거 메이지였다는 것이죠. 오우거 메이지의 블러드 러스트(피의 욕망)는 대미지를 2배 이상 뻥튀기시켜주는 마법이지만, 이 레벨에 해당하는 팔라딘의 힐은 이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효율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팔라딘이 좋았던 점은 오크의 최종 유닛인 데스 나이트를 엑소시즘 한방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 정도였죠.

AI가 제어하는 휴먼과 싸울 때면 팔라딘이 서로 모여서 힐만 넣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은 그렇게 컨트롤하기 어렵다는 점이죠

블리자드의 또 다른 게임인 ‘디아블로 2’에도 팔라딘이 등장했습니다. 디아블로 2의 팔라딘은 자카룸 교단에 속해서 대악마 메피스토의 봉인을 지키던 기사들입니다. 오로지 공격에만 신경 쓰는 바바리안과 반대로 ‘오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파티 지원 효과를 갖고 있기도 하죠. 기술 트리는 크게 3가지로, 방어 오라, 공격 오라, 전투 스킬입니다. 직접적인 치유 스킬은 없지만 블리자드표 팔라딘을 대표하는 오라들이 다수 추가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 3’에는 같은 자카룸 교단의 다른 집단인 성전사들이 등장하는데, 성기사와 유사하지만 보다 공격적인 스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디아블로 2의 성기사

‘워크래프트 3’에서는 아군 유닛의 치유와 언데드를 공격할 수 있는 홀리 라이트, 무적 시간을 제공하는 디바인 실드, 디보션 오라, 그리고 부활 마법으로 무장한 영웅 유닛으로 탈바꿈합니다. 특히 휴먼 캠페인의 주인공인 아서스 왕자(데스 나이트 되기 전)가 성기사 클래스였기 때문에 게임 중에 많이 다루게 되는 영웅이었죠.

워크래프트 3의 성기사
성기사에서 데스나이트가 된 아서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기존 워크래프트의 치유 마법, 무적 보호막, 오라, 부활까지 다 갖춘 하이브리드 클래스였습니다. 단 오리지널 WOW에서는 딜링이나 탱킹 면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고 힐러가 부족한 현상 때문에 오로지 힐만 하는 신성 성기사가 가장 흔했습니다만, 양손 무기를 들고 딜링하는 성기사는 많은 성기사 플레이어들의 로망이었고, 이후 징벌 트리가 강화되면서 딜링도 참여하고, 탱킹도 가능한 진정한 하이브리드 클래스로 거듭났습니다.

오리지널 때에는 얼라이언스는 성기사, 호드는 주술사로 각 진영을 대표하는 하이브리드 클래스였지만 이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지 확장팩 ‘불타는 성전’에서 호드에는 블러드 엘프 혈기사, 얼라이언스에는 드레나이 주술사가 주어졌죠. ‘대격변’에서는 호드에 블러드엘프 뿐 아니라 타우렌 성기사(태양길잡이), 트롤 성기사(정무관) 등이 추가되어 종족 선택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여러 종족이 추가되었어도 어쩐지 인간 남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 아닌가 싶습니다(고정관념)

 

다른 MMORPG의 팔라딘들은?

워크래프트의 성기사에서 살펴본 성기사들의 특징은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으며, 오라 및 버프 마법 등으로 아군을 지원하며, 무기를 사용한 전투도 능숙한 전사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들도 다른 앞선 게임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2001년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DAOC)’에서는 알비온 진영에서 팔라딘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전사가 사용하는 모든 무기 및 갑옷을 입을 수 있었고, 파티원들을 보조하는 여러 가지 오라(Aura) 및 챈트(Chant)가 있었습니다. DAOC의 팔라딘은 아군 전체의 체력이나 피로도를 관리하는 수비적인 버프는 물론, 공격 속도를 높이거나 대미지를 더하는 등의 공격적인 버프도 가능했습니다. 챈트는 사용을 중단하고 다른 챈트로 바꿔도 일정 시간 유지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챈트를 돌려가며 사용할 수 있었는데, 직접적인 치유 마법이나 무적기만 없을 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성기사와 매우 유사합니다.

서비스 초기에는 치유 챈트를 사용하면 현재 전투 중인 모든 몬스터의 어그로를 끄는 버그가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서 아군 전멸의 위기에 대신 죽고 나머지를 도망치게 하는 플레이도 있었습니다. WOW에는 ‘보호의 손길’이란 주문으로 전멸의 위기에 부활을 책임질 다른 플레이어를 살리는 스킬이 있는데, 혹시 여기서 따왔던 것은 아닐까 망상을 펼쳐봅니다.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의 팔라딘 클래스. 저(필자)도 팔라딘 했었습니다!

이전에도 3D MMORPG의 선구자 ‘에버퀘스트(1999)’ 등 많은 게임에서 성기사가 등장하지만, 이 모든 것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게임 판타지 백과에 자주 등장하는 그 롤플레잉 게임이 등장합니다. 바로 TRPG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D&D)’죠.

에버퀘스트의 팔라딘

 

이것이 원조?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팔라딘

초기 D&D에는 팔라딘이란 클래스가 없었습니다만, 1975년 발간된 그레이호크 서플먼트(부록)에 팔라딘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팔라딘은 전사에서 파생되는 직업으로 나옵니다.

처음 나왔을 때의 팔라딘은 매우 플레이가 어렵고 제한되는 점이 많은 직업이었습니다. 성향은 오로지 준법(Lawful, D&D 오리지널은 준법-중립-혼돈만 존재했습니다)이며, 매력이 17 이상인 전사가 레벨 9에 도달해야만 했습니다. 레벨 9면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리지널 D&D의 레벨 9는 성과 작은 영지 하나쯤 소유할 정도의 권력과 힘이 있는 군주 레벨입니다. 그런 전사가 성에 정착하지 않고 방랑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기사단과 계약을 맺어 팔라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어 일단 팔라딘이 되면 악을 탐지하고 안수 치유를 사용하는 등 마법적인 능력을 사용할 있게 되었습니다. 또 성검이 있으면 모든 마법에 면역이 되며, 전용 군마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우 강력해 보이지만 제약도 많아서, 전투에서 승리해서 보물을 얻더라도 최소한의 유지비를 넘어서는 이상의 부는 모두 기부하거나 갖지 않아야 하고, 성을 얻게 되더라도 20만 골드 이하의 검소한 성이어야 했습니다. 또, 장비한 것을 제외하고 4개 이상의 마법 물품을 갖는 것을 금했습니다.

팔라딘이 처음으로 추가된 ‘그레이호크’ 서플먼트.

그러다가 다음 버전인 어드밴스드 D&D(AD&D)에서는 기본 클래스 중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안수 치유(Lay on Hands), 악 탐지, 언데드 퇴치, 질병 면역 등의 능력에 9레벨부터는 성직자 주문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힘 12, 건강 9, 지혜 13, 매력 17이라는 능력치를 만족해야만 이 클래스를 할 수 있었던 것이죠.

D&D의 최고 능력치는 당시에는 18이었습니다. 18이란 숫자는 6면체 주사위 3개를 굴리기 때문에(이것을 3d6이라고 표현합니다) 최대치가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죠. 컴퓨터 게임에서야 플레이어가 주어진 수치 이내에서 마음대로 캐릭터의 능력치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TRPG에서는 직접 주사위를 굴려서 이 숫자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게임 마스터의 재량에 따라서 6개의 능력치를 순서에 상관없이 굴려서 할당하게 해주거나, 주어진 수치 내에서 배분하는 컴퓨터 게임 식의 변형을 한다면 몰라도, 룰 변형 없이 순서대로 능력치 주사위를 굴려서 마지막 6번째가 17이 나올 확률은 상당히 낮습니다.

3d6을 굴려서 17 이상이 나올 확률은? 그리고 그것이 6개의 능력치를 굴리는 동안 가장 마지막에 맞춰서 나올 확률은?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능했고, 준법-중립-혼돈에 선-악까지 추가된 9가지 성향에서 오로지 질서 선만 선택 가능했습니다. 기존의 부를 축적하면 안 된다는 룰 등도 여전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제한들은 D&D가 계속 버전업해가면서 점점 바뀌고, 현재 나온 5th 판에서는 능력치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고(기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높은 능력치가 요구되는 것은 마찬가지), 꼭 준법 선을 선택하지 않아도 믿는 신의 성향을 따라가면 되는 것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기반으로 만든 게임 속에 등장하는 팔라딘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D&D 5판의 팔라딘의 대표 이미지인 하프 오크 팔라딘.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의 팔라딘

D&D 기반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 중 손 꼽히는 것은 바이오웨어/블랙 아일 제작의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게임 시리즈에는 플레이어가 직접 팔라딘을 플레이할 수 있지만 동료로 등장하는 팔라딘들도 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1’에서는 팔라딘인 아잔티스가 있으며, ‘발더스 게이트 2’에는 켈돈 파이어캠이 있습니다. 켈돈 파이어캠은 팔라딘의 클래스 키트인 인퀴지터, 즉 이단심문관으로 강력한 디스펠 능력과 트루 사이트 주문 등이 특기입니다. 강력한 보호 마법, 환상 마법으로 무장하는 마법사 계열 적들이 많이 등장하는 발더스 게이트 2 특성상 마법사 킬러로 활약합니다. 단, 팔라딘의 장점 중 하나인 안수 치유와 성직자 주문 등을 쓰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1편의 동료였던 아잔티스는 2편에서 레드 드래곤 퍼크라그의 음모로 인해 주인공 일행을 괴물로 오인하고 공격해오며, 환상을 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죠. 발더스 게이트는 1편의 동료들이 2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이 사건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이후 퍼크라그를 죽이게 되면 일명 홀리 어벤져라 불리는 성기사의 성검 ‘카르소미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카르소미어는 성기사만 착용할 수 있는 마법검, 홀리 어벤져로 플레이어가 팔라딘이 아니라면 켈돈 고정장비로 게임 엔딩 때까지 쭉 사용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무기입니다. 홀리 어벤져는 성기사라면 꼭 한자루 가져야하는 검이지만, 실제 TRPG에서는 어려운 퀘스트를 완수하거나 전 재산(검 하나가 큰 성 하나 가격)을 탈탈 털어 사는 게 아니면 장만하는 게 불가능한 무기이기도 하죠.

아잔티스. 정의로움이 철철 넘치는 모습입니다
오랜 기간 악과 싸워온 노련함이 묻어나는 켈돈

또 팔라딘은 아니지만 팔라딘이 되려는 동료들도 있는데, 준법-중립 전사/성직자 멀티 클래스인 아노멘은 성기사 시험에서 떨어진 인간 동료로, 같이 여행하다 보면 왜 시험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찌질함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퀘스트 여부에 따라 기사단에 들어가는 데는 성공할 수도 있지만, 팔라딘 전직은 못합니다.

또 하플링 마찌 펜탄은 ‘하플링은 성기사가 될 수 없는’ 룰 때문에 좌절한 전사 동료로 성기사의 안수 치유 능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발더스 게이트 2때의 룰은 AD&D 2nd로 당시에는 인간만 팔라딘이 가능했지만, D&D 3판부터는 다른 종족도 가능해졌습니다.

오리지널 발더스 게이트 2의 주인공을 여자 캐릭터로 하면 유일하게 연애 가능한 캐릭터가 아노멘 뿐이었습니다. 이후 인핸드스 에디션에는 4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팔라딘 지망 하플링 전사 마찌 펜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의 팔라딘 동료들은 모두 질서 선이라서 악한 성향의 동료를 맞아들이거나, 명성이 낮아지게 되면 결국 파티를 떠나기도 합니다.

악 성향 플레이를 하는 플레이어들을 위해 팔라딘에 대항하는 악의 클래스인 블랙가드 동료도 ‘발더스 게이트: 인핸스드 에디션’에서 추가되었는데, 하프 오크 블랙가드 ‘도른 일칸’은 AD&D 당시에는 인간만 팔라딘이나 블랙가드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해 악마인 울고스에게 영혼을 팔아 블랙가드가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하프 오크 블랙가드, 도른 일칸

  

네버윈터 나이츠의 타락한 팔라딘, 아리베스

같은 바이오웨어의 ‘네버윈터 나이츠(2002)’에는 히로인으로 아리베스(Aribeth)라는 하프 엘프 성기사가 출연합니다. 티르의 성기사인 그녀는 네버윈터에 떠도는 전염병, 웨일링 데스의 조사를 맡아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 좋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만, 이후 전염병을 일으킨 사교단체와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남자친구가 사형당하자 절망한 아리베스는 결국 사교단체에 들어가서 타락하게 됩니다.

당시 네버윈터 나이츠의 대표 이미지로 나오는 인물이기도 했고, 섹시한 여자 기사의 모습이 매력적이라서 그에 혹해 게임을 플레이했지만 결국 타락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 플레이어들도 많지 않았을까요?

네버윈터 나이츠의 중심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기는 많아서 확장팩 ‘호드 오브 더 언더다크’ 에서는 저승에서 만나서 연애도 가능했습니다.
네버윈터 나이츠의 중심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기는 많아서 확장팩 ‘호드 오브 더 언더다크’ 에서는 저승에서 만나서 연애도 가능했습니다.

 

잠깐, D&D 팔라딘의 원조도 따로 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팔라딘은 1975년에 추가된 룰인만큼 게임 계의 성기사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D&D의 아버지 개리 가이각스는 ‘반지의 제왕’은 물론, 여러 소설과 전설 등에서 영감을 받아 룰을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팔라딘의 영감을 준 작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SF 판타지 작가 폴 앤더슨의 ‘세 개의 심장과 세 마리의 사자(Three Hearts and Three Lions’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1961년 발간된 판타지 소설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덴마크 레지스탕스였던 주인공 홀거 칼슨은 나치에게서 탈출하려는 과학자 집단을 이끌고 덴마크 국경을 넘다가 큰 폭발이 있은 후 갑자기 평행 세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세 개의 심장과 세 마리의 사자’ 초판 표지.
‘세 개의 심장과 세 마리의 사자’ 초판 표지.

그가 가게 된 세계는 요정과 난장이 등 판타지 요소가 가득한 세계 ‘미들 월드’였습니다. 중세 유럽, 그중에서도 카롤루스 대제가 지배했던 시대와 비슷한 이곳은 질서의 세력과 혼돈의 세력이 영원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신기하게도 자신에게 꼭 맞는 갑옷과 세 개의 심장과 세 마리의 사자가 그려진 방패를 얻었으며, 자신이 검을 쓰는 방법도 잘 알고 있으며 유창한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모험 도중 백조의 소녀 알리아노라와 드워프 휴지(Hugi)를 만나게 되며, 강한 괴물들을 물리쳐 성검 코르타나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실 그가 그 세계의 영웅인 오지에 르 다노아(Ogier the Dane)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성검의 힘을 이용해서 혼돈의 세력들을 격파하고, 본래 세계로 돌아가 나치의 추적도 따돌려 과학자들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합니다. 탈출시킨 과학자 중에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덴마크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였습니다. 홀거 칼슨은 동시에 2개의 세계에서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공헌한 것이었습니다.

백조 소녀 알리아노라와 드워프 휴지와 모험 중인 홀거 칼슨
백조 소녀 알리아노라와 드워프 휴지와 모험 중인 홀거 칼슨

모험 도중 홀거 칼슨은 백조의 소녀 알리아노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 사랑은 잠시 미뤄두고 행동하는 절제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미들 월드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으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후 단편 소설을 통해서 알려진 후일담으로 홀거 칼슨은 다시 미들월드로 돌아가지만, 알리아노라는 이미 결혼을 해서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한 것으로 끝맺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오지에 르 다노아는 전설 속 카롤루스 대제의 12 용사 중 한 명으로, 르 다노아는 덴마크인(the Dane)이란 뜻이며 그는 홀거 단스케(Holger Danske)라고도 불립니다. 즉 이 소설의 주인공인 홀거 칼슨과 이름이 비슷하죠. 즉 홀거 칼슨이 평행 세계 속의 홀거 단스케와 동일인물이 된 것입니다.

덴마크 크론버그 성에 있는 오지에 르 다노아 = 홀거 단스케의 상
덴마크 크론버그 성에 있는 오지에 르 다노아 = 홀거 단스케의 상

이 작품에는 팔라딘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선의 세력을 대표해서 싸우는 기사, 그리고 성검을 얻기 위한 퀘스트, 악을 타도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사욕(사랑)도 미뤄두는 점 등이 D&D의 팔라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팔라딘은 언제부터 치유 마법을 썼나?

한편, D&D의 팔라딘들은 성직자의 마법을 사용함으로 치유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데, 치유 마법을 쓰는 전사라는 개념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구호 기사수도회’가 바로 그것인데, 줄여서 ‘몰타 기사단’이라고 하며, ‘구호(병원) 기사단(Knight Hospitaller)’라고 하면 알아듣는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몰타 기사단은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정복(1099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성지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발전한 기사단입니다.

이들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하는 이들이 다쳤거나 병에 걸렸을 경우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60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아 만들어진 병원을 시초로 합니다. 1023년에 세워진 병원은 성 요한의 묘지에 세워졌으며, 1113년에는 기사 수도회로 정식 승인을 얻어 군사적인 성격도 강화해나갑니다.

과거 몰타 기사단 소속 기사의 무장한 모습
과거 몰타 기사단 소속 기사의 무장한 모습

몰타 기사단이 예수살렘에 있을 당시에는 당시 최대 2천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과 숙박 시설도 있었을뿐더러, 군사적인 행동이 없을 때에는 환자를 위해 의료 봉사하는 것이 기사단원의 의무였습니다. 이후 몰타와 로도스 섬 등지에 영토를 지닌 국가로 기능했지만, 현재는 그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래도 현재 몰타 기사단을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들도 104개국이 있다고 합니다(우리나라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직자에 의료봉사, 거기에 급한 일이 있으면 전쟁도 벌이는 이들의 이미지가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성기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요?

몰타 기사단의 국기
몰타 기사단의 국기

  

다른 게임 속의 유명한 팔라딘(성기사)들

일본 비디오 게임의 팔라딘은 치유, 보호 오라의 이미지보다는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파이널 판타지의 팔라딘

우선, 일본 비디오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팔라딘은 ‘파이널 판타지 4’의 세실 하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파판 4의 주인공인 세실은 게임을 시작할 때에는 바론 왕국의 비공정 부대, 붉은 날개의 단장이자 암흑 기사입니다. 암흑 기사는 체력의 일부를 소비해서 ‘암흑’이라는 전체 공격을 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죠.

그는 크리스탈을 구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의 학살을 명하는 바론 국왕의 말을 거역했다가 단장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고, 미스트 마을에 봄(Bomb)의 반지를 전하라는 하찮은 심부름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반지로 인해 미스트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 세실은 속죄를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모험 끝에 성기사의 시험을 통과해서 암흑 기사의 길을 거부하고 팔라딘이 된 세실이 갖게 되는 능력은 백마법(치유 중심의 마법)과 감싸기 능력입니다. 감싸기는 빈사가 된 아군의 공격을 대신 맞아주는 능력으로,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능력이기에 팔라딘 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감싸기 능력은 파이널 판타지 5에서 '나이트'로 옮겨가면서 팔라딘이 이후에 등장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암흑 기사일 때의 세실(앞)과 팔라딘이 된 세실(뒤)
암흑 기사일 때의 세실(앞)과 팔라딘이 된 세실(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주역들이 모두 등장하는 대전 액션 게임 ‘디시디아 파이널 판타지 NT’에 등장한 세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주역들이 모두 등장하는 대전 액션 게임 ‘디시디아 파이널 판타지 NT’에 등장한 세실.

 

드래곤 퀘스트의 팔라딘

파이널 판타지와 함께 JRPG의 양대 산맥인 ‘드래곤 퀘스트’에도 팔라딘이 등장합니다. 드래곤 퀘스트는 시작부터 D&D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했던 게임이지만 팔라딘이 등장한 것은 ‘드래곤 퀘스트 6’부터입니다. 승려와 무투가를 거쳐서 전직할 수 있는 상위 직업이지만 드래곤 퀘스트의 최종 직업이자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한 용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직업이 아니며, 마스터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투 횟수가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이 난점입니다.

‘대신 맞기(みがわり)’나 ‘인왕 서기’ 등의 스킬은 위기에 빠진 아군을 대신해서 공격을 맞거나, 자신을 공격하도록 적을 유인하는 기술로, ‘파이널 판타지 4’의 팔라딘 세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HP와 MP를 모두 소모해서(즉, 자살해서) 아군 모두를 부활시키는 메가잘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 7’에서는 ‘그랜드 크로스’를 배울 수 있는데, 이 특기는 ‘드래곤 퀘스트 타이의 대모험’이란 만화에서 처음 등장한 ‘그랜드 크루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원작 만화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투기로 변환, 검이나 십자가 모양의 물체에 투사해서 방출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 9’에서는 대표적인 자살 전체 공격 마법인 ‘메간테’를 익히기도 합니다.

‘드래곤 퀘스트’를 소재로 그린 만화지만, 만화속 기술들이 게임으로 역수입된 사례 중 하나인 ‘그랜드 크루스(크로스)’.
‘드래곤 퀘스트’를 소재로 그린 만화지만, 만화속 기술들이 게임으로 역수입된 사례 중 하나인 ‘그랜드 크루스(크로스)’.
드래곤 퀘스트 9의 팔라딘
드래곤 퀘스트 9의 팔라딘

팔라딘은 6편과 7편, 9편, 10편에서 등장하는데, 8편과 11편은 직업 요소는 없지만 최신작 ‘드래곤 퀘스트 11’에 등장하는 마지막 동료(스포일러로 이름은 안 밝힘)가 팔라딘의 기술 중 ‘인왕 서기’를 갖고 있으며, 이 동료가 포함된 3인 연계기로 ‘성기사의 증명’이란 기술이 있습니다. 이 연계기를 사용하면 이 비밀 동료가 ‘팔라딘 가드’라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2턴 간 완전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므로 인왕 서기와 조합하면 적의 공격을 모두 다 받아낼 수 있습니다.

 

폴아웃 4의 팔라딘 댄스

갑자기 ‘폴아웃 4’가 나오는 이유는, 폴아웃 세계관에서 큰 군사집단인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의 계급 중에 팔라딘이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은 폴아웃 세계관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일종의 기사단으로, 여기서 팔라딘은 직업보다는 칭호지만 동료로 등장하는 팔라딘 댄스(Danse)는 일반적인 판타지 게임 속의 팔라딘과 행동이 비슷합니다.

그는 악한 행동, 군인답지 못한 행동을 싫어하고 악한 집단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굉장히 딱딱한 군인 캐릭터로 여러모로 고지식한 면도 보이지만, 사실 자신도 몰랐든 그의 정체는…(스포일러). 그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적대했던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란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폴아웃 4를 관통하는 주제가 팔라딘 댄스의 이야기에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파워 아머를 입고 있는 팔라딘 댄스. 플레이어가 파워 아머를 입으면 좋아요 누릅니다.
언제나 파워 아머를 입고 있는 팔라딘 댄스. 플레이어가 파워 아머를 입으면 좋아요 누릅니다.

마지막으로 D&D 이야기를 다시 해보며 마칠까 합니다. 비디오 게임 속 팔라딘들이 대표적으로 갖고 있는 오라(아우라, Aura) 능력은 일정 범위 내의 파티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좋은 능력이죠. 하지만 과거의 D&D에는 오라와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게임 속의 팔라딘들이 대표적으로 갖고 있는 오라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3판에 용기의 오라, 5판에는 보호의 오라가 추가되면서 원조 팔라딘도 오라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원조 팔라딘도 오라 같은 범위형 버프 스킬이 있었지만,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게임들에서는 여러 가지 오라를 상황에 맞춰 바꿔가며 사용하는 것이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D&D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굳이 원조가 이랬다 저랬다를 따지는 것보다 좋은 개념을 받아들여서 바꾸는 것, 하늘 아래 새로운 창작 찾기 어려운 요즘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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